시스템설계를 마치며

시스템설계: 캡스톤디자인. 기계과 졸업과제. 학부에서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었다. 졸업과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종합설계랑 비슷하게 시스템설계도 잘하고 싶었다. 사실 종설을 무사히 마친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사건의 발단

팀은 무난하게 꾸려졌다. 여름방학에 연구실에 같이 있던 창균, 자영, 그리고 창균에게 같이 하자고 했던 정민, 그리고 어떤 경위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수업 끝나고 교수님께 질문하고 돌아오니 합류해있던 기성이형까지.

시스템설계는 여름방학 때 해야하는 게 없어서 좀 편했는데, 보니까 중간고사 전까지 주제 정하고 중간고사 끝나고 만들어야 하는 일정이라 많이 타이트해 보였다. 이래저래 위태위태해 보이는 설계가 시작되었다.


전개

일단 주제를 정해야 했다. 사실 처음에는 연참 때 하던걸 그대로 가져갈까 생각했다. 여름방학에 연참하던게 작년부터 거의 1년 동안 하던거고, 결과도 좀 괜찮게 나와있어서 그대로 만들기만 하면 그럴싸해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날먹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팀별 주제를 정하기에 앞서, 모든 학생이 각자가 생각한 주제를 발표해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주제는 ‘과속방지턱’이었다. 근데 이제 움직이는. 동기는 단순했는데, 현재 사용되는 정적 과속방지턱은 싸고 튼튼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기능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차에 충격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과속방지턱의 설치 목적이 차량의 주행 속도를 규정 속도 미만으로 제한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규정 속도 미만으로 주행하는 저속 차량에게도 패널티를 주는 것이 큰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지금처럼 정적 구조물을 설치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과속방지턱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잘 움직일 수 있지? 생각하다가 안전벨트가 떠올랐다. 자동차의 안전벨트는 유사시 탑승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게 잡아당기면 잠금이 걸린다. 하지만 천천히 잡아당기면 잘 나온다. 아마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이것이 관성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고 배웠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훌륭한 speed-selective한 시스템을 찾았으니, 잘 엮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각자 주제를 발표한 이후에 팀 내에서 주제를 정해서 교수님께 말씀드리거나, 제시된 주제 중에서 교수님이 지정해주셨다. 우리 팀은 제시된 주제가 다 괜찮아서 고민이 되었고, 그냥 교수님께서 정해주시는 걸로 하기로 했다. 운 좋게도 내 주제가 선정되었다.

아이디어를 구체화해야 했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차량이 방지턱을 밟고 지나가면 차량의 속도에 따라 방지턱이 움직이는 속도가 달라질 것이니 빠르게 움직이면 안전벨트 시스템을 이용해 움직임을 제한하자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방식이 매우 직관적이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발전시키다 보니 차량의 속도와 방지턱의 속도 사이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더 큰 문제는 방지턱의 속도가 차량의 속도뿐만 아니라 질량 등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러면 방지턱의 동작이 차량의 속도에만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무거운 차는 천천히 지나가도 패널티를 받고 가벼운 차는 빠르게 가도 패널티를 받지 않는 등 시스템이 목적과 다르게 작동할 가능성이 있어서 아이디어는 폐기되었다.

그 다음으로 제시된 아이디어는 지면에 접하는 롤러를 지하에 설치하고 차량이 그 위를 지나가면서 마찰에 의해 롤러를 굴리는 방식이었다. 이 경우 미끄러짐 없는 구름을 가정하면 롤러의 회전선속도가 차량의 속도와 일치한다. 또한 시스템의 입력 저항이 작다고 가정하면 시스템과의 접촉으로 인해 차량이 받는 충격도 거의 없기 때문에 괜찮은 방식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이제 해야 할 것은 (1) 아이디어 발전, (2) 제작 및 실험이었다.

자동차의 이동에 의해 발생하는 롤러의 회전을 이용해 방지턱을 움직이기로 했고, 이를 위해 롤러와 방지턱 사이에 gear train을 설치했다. Gear train의 한 축에는 안전벨트를 연결해서 speed-selective한 동작을 구현했다. 그러면 gear motion이 있는 경우에 방지턱이 내려오고, 없는 경우에 정지해 있는 메카니즘을 만들어야 했다. 이것은 toggle position을 응용해서 만들었다. 보통 toggle position은 4-bar linkage에서 발생하는데 우리는 5-bar linkage로 만들었다. 근데 사실상 4-bar처럼 작동하기는 한다. Toggle position에 의해 방지턱을 위에서 아무리 눌러도 움직이지 않고, 액추에이터가 작동해야만 링크들이 움직이면서 방지턱이 내려올 수 있다.

방지턱 설계도 거의 예술로 했는데, 움직이는 동안 지면과 닿지 않아야 하고 다 내려왔을 때는 평지가 되어야 했다. 부채꼴과 직각삼각형을 합쳐서 해결했다.

와! 이제 진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위기

작은 모형으로 제작하기로 했고, 나무나 아크릴을 가공해서 상자를 만들어 구현하기로 했다. 일단 안전벨트 모듈을 분석하기로 했다. 관련 특허를 찾아봤는데 부품이 20여개나 되었다. 이걸 직접 만들 자신도 없었고, 만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똑똑한 박사님들이 다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굳이 또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인근 폐차장에 방문했다. 근데 흔히 찾는 부품도 아니고 이것을 캐려면 분해를 많이 해야 해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군데를 돌아다닌 결과 안전벨트 모듈을 뜯어주시겠다는 사장님이 계셨다. 심지어 아카데믹 라이센스로 해주셨다(무료라는 뜻). 흥해공고 다니냐고 물어보시길래 포항공대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그렇게 어려보였나?ㅎㅎ 아무튼 모듈을 무려 2개나 획득했다. 가장 어려울 것 같았던 안전벨트 부분이 쉽게 해결되니 남은 일은 일사천리로 끝날 듯 했다.

기계공학과 학생이 역학을 못하는 죄로 벌을 받았다. 일단 다 만들었는데, 만들고 나니까 차가 지나가도 롤러를 굴리지를 못했다. 처음에는 제작을 잘못해서 안굴러가는 줄 알고, 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나온 결론: 이거 안굴러가는게 맞는듯. 차의 질량이 크고, 타이어에 변형이 일어날 수 있어서 차량 바퀴와 롤러 사이에 line contact이 생기면 굴러가는데, 그렇지 않아서 point contact이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진짜 좌절했다. 이대로 끝나는건가? 우리 졸업할 수 있나? 새벽 4시에 학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실패 보고서는 어떻게 쓸지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는 너무 처량했다.

사실 원래 만들려고 했던 것은 다 만들어서 이대로 때려칠까 했었는데,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원래 만들려고 했던 것은 다 만들었는데’→이제 데모만 잘 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든 시스템은 우리가 의도했던대로 잘 굴러가는데, real world와 prototype간의 차이로 인해 구현하지 못한 부분이 생긴 것이니 이 부분만 어떻게 잘 처리를 해서 발표를 하자…라는 얘기였다.

여기서부터는 현실성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롤러를 굴릴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차에 실을 달아서 축을 돌리자, 차가 바닥에 있는 막대를 밀고 가게 하자, 차 바퀴를 타이밍풀리로 만들고 바닥에 타이밍벨트를 깔자… 등등 별의별 아이디어가 다 나왔는데, 결국 채택한 것은 ‘차량의 속도를 측정해서 그 속도에 비례하게 모터를 돌려주자’였다. 아마 아두이노로. 사실 이 방법이 우리가 생각한 것들 중에서 제일 쉽고 강력한 방법이었다. 근데 하기 싫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우리의 시스템에 전자부품을 넣지 말자고 했었는데, 이 방법을 쓰면 패배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정말 하기 싫었다. 근데 이것보다 좋은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야만 했다.

위의 문제가 발생한게 발표 3주 전이고, 아두이노를 시작한게 2주 전이니까 정확히 2주 동안 아두이노에 매달렸다. 진짜 별의별 문제가 다 발생했다. 노이즈 때문에 속도 측정이 잘 안되는 문제, 초음파 센서가 너무 광각이라 생기는 문제, 초음파 센서가 귀신을 보는 문제, 모터 토크가 부족해서 롤러를 못 굴리는 문제, 단차, 유격, 서보모터 토크 부족 등등 지금도 생각만 하면 짜증부터 나는 문제들을 2주 동안 붙잡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기막히게 해결해서 다행이다.


결말

꼬박 2주 동안 밤을 새고, 발표날까지도 밤을 샌 우리는 결국 우리가 원하던 데모를 구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최종발표가 아침 9시였는데 아침 6시 정도에 성공을 했으니 3시간이 남았던 셈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반나절만 허투루 썼어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 하여튼 성공적으로 데모 영상을 찍고, 발표 준비를 하고, 발표를 하고, 현장 데모까지 성공했다.

12월에는 다른 과목들이 많이 바쁘지 않아서 거의 한 달을 온전히 설계에 썼는데, 하나의 프로젝트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은 진짜 처음인 것 같다. 비단 프로젝트뿐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이 정도로 몰두한 적이 없었는데, 끝까지 파고들면서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단순히 제작이라는 과정에 필요한 기술, 노하우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끈기, 문제 해결, 협동을 배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재밌었다”. 와 대학원 가면 이걸 하루종일 할 수 있다고? 정말 기대된다ㅎ.ㅎ.ㅎ

무슨 말을 해야할까.

수고했다!

마침.